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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칼럼 및 웹툰

어린이청소년연구 e-Partner는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발간된 웹진으로 다양한 아동문학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아동문학발견」과 국내·외 그림책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해설이 있는 그림책」을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현재 2014년~2018년 기사만 서비스 가능

    • 제목 아동문학 발견 (어린이청소년연구 2018년 12월 124호)
    • 집필명 박세현 (경기대학교 외래교수, 만화이론가)
    • 내용 우리는 왜 만화에 폭 빠지는 걸까요? 그림1 원시시대 동굴벽화 만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만화의 탄생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기원전 3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 당시에 우리 조상으로 크로마뇽인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원시인들은 추위와 더위를 피해서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연과 신을 경배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서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동굴벽화입니다. 이 벽화가 바로 만화의 조상입니다. 프랑스 남부의 라스코 동굴벽화와 쇼베 동굴벽화, 스페인 북부에 있는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그것입니다. 이 동굴벽화에 그려진 소, 말 등의 가축 그림이 인간이 글보다 먼저 터득한 소통 문자인 셈이죠. 여기서 재미난 점은 당시 원시인들이 이 동굴벽화에 소나 말 등을 그리면서 동굴 벽면의 굴곡을 적극 활용하여 그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그려진 동물들의 움직임은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죠. 심지어 르네상스에나 볼 수 있었던 원근법과, 20세기 미래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기법(여러 개의 다리를 그려 마치 달리는 표현을 함)을 활용하기도 했으니, 정말 대단한 조상님들이죠.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집안 벽이나, 신전, 도자기, 카펫 등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양피지, 소가죽 등에 성경구절과 그림을 그려서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게 했습니다. 이 그림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수님, 성모 마리아, 악마 등이 그려졌습니다. 그러다 중세 후반에 중국과 페르시아를 거쳐서 유럽에 종이가 전파되면서, 인쇄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지금 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림2 루돌프 퇴퍼의 만화 지금 우리가 보는 만화는 칸, 말풍선, 글, 그림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만화의 형태가 만들어진 것은 세월이 한참 흘러서 1837년에 스위스의 한 고등학교 선생이었던 루돌프 퇴퍼 덕분입니다. 그는 수업을 지루해 하는 학생들에게 재미난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만화 <브와브 씨의 이야기>를 창작했습니다(그때도 수업은 재미없었나 봅니다). 이 만화에는 칸과 대사, 그리고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만화가가 등장한 셈이죠. 그러다 1895년 미국 뉴욕의 신문 <뉴욕 월드> 일요판에 만화가 리처드 펠튼 아웃코트가 노란 옷을 입은 꼬마 주인공 ‘옐로 키드’에 대한 만화를 연재하였으며, 1928년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에 지금의 인기 캐릭터 ‘미키 마우스’를 등장시키면서 본격적으로 만화가 인기를 얻게 됩니다. 지금 한국에서 만화는 웹툰으로 불립니다. 이젠 만화라는 말보다 웹툰이라는 말이 더 익숙합니다. 초등학생들이 선호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웹툰 작가일 정도로 웹툰의 인기는 대단합니다. 사실 웹툰은 2003년 포털사이트 다음에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가 연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2018년, 지금 웹툰 작품이 8,000편이 넘고 작가도 4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만큼 웹툰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대중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만화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우린 만화를 보다보면 만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 만화는 이차원 평면(만화용지) 위 그것도 칸들 속에 갇혀 있는 그림입니다. 그럼에도 만화 속 인물과 사물 들은 움직이고 심지어 소리까지 뿜어냅니다. 또한 칸과 칸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지능력 가운데 잔상효과와 연상효과 덕분입니다. 잔상효과는 이전의 이미지를 기억하여 다음 이미지와 연관 지어 인식하는 인지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분명 칸과 칸 사이는 떨어져 있음에도 이전 칸의 이미지를 기억한 상태에서 다음 칸의 이미지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분리된 칸들이지만 마치 연속적인 이야기로 쭉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한편 연상효과는 단순한 그림을 보고도 사실적인 사물로 인식하는 인지효과입니다. 가령, 아이들이나 원시인들이 그린 동물은 단조롭고 조악하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것이 어떤 동물인지 금세 알아차립니다. 결국 사물의 기본 형태만으로도 사실적인 사물로 인식하는 겁니다. 이것을 만화에서는 도상화라고 하는데, 단순화 된 그림을 사물의 사실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이 두 효과가 만화의 첫 번째 매력입니다. 그럼 만화의 두 번째 매력은 무엇일까요? 만화의 첫 번째 매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분명 만화는 평면 그림임에도 움직입니다. 또한 만화 속 인물과 사물 들이 각자 소리를 낸다는 겁니다. 말풍선, 동작선, 의성어, 의태어라는 효과를 통해서 우리는 만화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말풍선에는 대사가 들어갑니다. 동작선, 의성어, 의태어를 통해서 움직임의 강약에 대한 정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동작선, 의성어, 의태어가 거칠게 표현되면 인물이나 사물의 움직임도 거칠고 격렬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을 만화기호 심리학이라 합니다. 이처럼 만화는 다양한 기호들로 표현됩니다. 우??물의 심리상태까지 느끼게 됩니다. 재미난 점은 이러한 만화기호를 교육을 통해 학습하면서 배우게 아닙니다. 직관력처럼 만화를 보면서 직접적으로 인지합니다. 그래서 글을 모르는 아이들도 만화를 보면서 울고 웃을 수 있는 겁니다. 그림3 네이버 웹툰 만화의 세 번째 매력은 단연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잠깐 만화란 무엇인가, 라는 정의를 살펴볼까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만화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 그림, 글, 칸, 그리고 이야기입니다. 이걸 조합해 볼게요. ‘만화는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칸으로 표현된 이야기’입니다. 만화는 연속적인 칸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결국 우리 는 만화를 보면서 이야기의 신세계로 빠집니다. 그 소재는 무궁무진합니다. 판타지, 학교, 친구, 여행, 역사, 한자, 액션, 로봇, 소설, 신화 등등. 이처럼 무궁무진한 소재는 만화를 여러 권의 시리즈로 만들어 이야기의 생명력과 상상력을 키워줍니다. 만화의 재미에는 뭐가 있나요? 만화의 매력을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을 빼먹었네요. 그게 뭘까요? 바로 재미입니다. 영화, 문학, 게임과 함께 만화는 대중문화 콘텐츠입니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기본 요건은 대중에게 재미를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린이들 위한 것이든 어른을 위한 것이든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대체 재미가 뭘까요? 아니, 우리 는 만화에서 어떤 재미를 느낄까요? 간략하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웃음입니다. 만화 이야기의 황당함, 반전 등이 아이들을 웃게 만듭니다. 웃게 만드는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아이들은 표현합니다. 그 다음은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입니다. 만화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나옵니다. 영웅, 우주, 외계인 등입니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면서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이것이 만화의 재미입니다. 그림 4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그 다음은 바로 지식과 교양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마법천자문> 그리고 <먼나라 이웃나라>입니다. 이들 만화는 각 1500만 부 이상의 판매를 보이면서 한국만화사의 경의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들 만화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신화, 한자, 여행과 역사라는 독특한 소재 덕분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우린 이 소재들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공통 키워드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교양입니다. 다시 말해, 만화로 교양하라는 것이죠. 이제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일본과 미국, 프랑스의 만화 독자층은 그림을 볼 줄 아는 나이 7세부터 80세까지입니다. 얼만 전까지 우리는 좀 달랐습니다. 서른을 넘긴 사람이 지하철에서 만화를 보면 어린애나 백수 취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웹툰 전성시대인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감상하고 즐깁니다. 스마트폰이 이제 만화방인 된 셈입니다. 이제 웹툰(만화)은 종합예술 가운데 으뜸이며 행복한 오락입니다. 박세현 경기대학교 외래교수 만화이론가로 저서로는 <캐리커처의 역사>, <만화가 사랑한 미술>, <미술 속 만화 만화 속 미술>, <비어즐리 또는 세기말의 풍경>, <만화로 교양하라>가 있습니다.
    • 제목 해설이 있는 그림책 (어린이청소년연구 2018년 12월 124호)
    • 집필명 김환영 (그림책 작가)
    • 내용 오리건의 여행 커다란 그림책을 펼치면 판권란 위쪽에 랭보(1854~1891)의 시 <감각>(Sensation, Jean-Nicolas-Arthur Rimbaud,1870.3.)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1871)의 자서이기도 한 이 시의 둘 째 연 첫 문장이 마음을 흔든다.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 이 문장에는 생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인의 자기응시가 묻어있다. “상쾌한 여름 저녁이 되면 나는 들길을 가리라.”로 시작하는 시는 얼핏 자연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사랑을 잃지 않고 홀로 떠나는 여행이란 없을 것이다. 방랑으로 점철한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베를렌)의 시는 이어진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만이 솟아오르네.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름 저녁의 느낌을 매우 연한 언어를 통해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생명을 낳고 기른 대자연뿐일지도 모른다. 황금색 들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책의 표지처럼. 한동안 절판되어 만날 수 없었던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라스칼 글. 루이 조스 그림/미래아이2017)은 서커스단의 난쟁이 어릿광대 ‘듀크’와 재주부리는 곰 ‘오리건’을 등장시켜 인생과 우정에 대해 그리고 있다. 나는 이 그림책을 통째로 삶에 대한 은유로 읽게 된다. “우리는 ‘스타 서커스단’에서 만났습니다.” 이 첫 문장으로 주인공인 난쟁이 어릿광대 ‘듀크’와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은 서커스단에서 관객들을 위무하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난쟁이 어릿광대인 듀크는 “붉은 막 뒤에 숨어”서 곰을 보며 “두려움도 잊은 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는 하지만, 어릿광대 듀크가 하는 일이란 재주 부리는 곰인 오리건을 우리에서 끌고 나오거나 다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 그런 듀크에게 오리건은 말한다. “듀크, 나를 커다란 숲속으로 데려다 줘.” 곰이 말을 하는 거야 그림책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마치 동화책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벌어졌다고 책은 쓰고 있다. 이 문장이 적혀있는 <화면2>에는, 왼쪽 면에 오리건을 끌고 가는 오리건과 듀크의 실루엣이, 오른쪽 면에 커다란 등을 보이고 있는 오리건과 오리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어릿광대 듀크를 그려놓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고삐와 철창이란 ‘경계’를 전제로 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인데, 경계를 넘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인 듀크가 아니라 곰인 오리건이다. 화가는 다만 몇 개의 선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있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화면을 가득 채울 듯 등을 보이고 있는 어두컴컴한 곰의 정면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다. 하지만 어두운 철망에 갇힌 채 “나를 커다란 숲속으로 데려다 줘.”라 말하고 있는 오리건의 저 묵언의 표정은 자못 강렬해서, 흰 분칠에 빨강코를 한 어릿광대 듀크의 얼굴과 극렬하게 대비되고 있다. 세로로 죽죽 그어진 철망을 경계로 오리건을 응시하던 듀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지만, 거울 앞에서 분칠한 가면 너머의 본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주를 부리고 나서” 듀크는 오리건과 함께 밤길을 나선다. “무거운 짐과 주머니를 축 늘어지게 하는 열쇠 꾸러미는 두고” “검게 그을린” 공업도시 피츠버그를 뒤로 한 이 둘은 마침내 버스에 올라탄다. 듀크와 오리건은 “시카고로 가는 기차표 두 장과 햄버거 삼백 개”를 산 다음 수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종족인 Sioux족)의 여관에 든다. ‘인디언 여관’에 방을 잡은 듀크는 ‘코크’를 빨며 총을 든 카우보이가 등장하는 TV를 보고 있고, 오리건이 방바닥에 쏟아놓은 ‘햄버거’를 먹고 있은 장면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와 함께, 트럭 운전수 스파이크와 여전히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있는 듀크의 대화는 미국 내 소수자들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왜 아직 빨강코에 분칠을 하고 있소? 이젠 서커스 무대에 서지도 않는데.” “살에 붙어 버려서요. 난쟁이로 사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흑인으로 사는 건 쉬운 일 같소?” 듀크와 오리건은 마침내 도시를 떠나 “반 고흐의 그림 같은 들판”에 들어선다. 표지와 동일한 이 장면은 그러나 그림의 방향이 서로 정반대라 느낌이 다르다. 표지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본문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본문 그림을 살짝 클로즈업한 순방향의 표지 그림이 성큼성큼 밖을 향해 전진하는(a→b) 느낌이라 자리로 천천히 귀의(歸依)하는(a←b) 안정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바람의 방향(a→b) 또한 이들의 진행속도(a←b)를 슬쩍 늦추고 있기도 하다. 펼침면에 그려진 이 장면은 황금색 들판만이 펼쳐져 있을 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전봇대 하나, 나무 한 그루 없이 망망한 수평의 들판만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다. 마치 자신들이 살아온 흔적 같은 긴 그림자를 끌며 목마를 탄 듀크는 오리건과 한 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리건의 여행》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이 장면을 꼽을 것 같다. 표지로 쓸 만큼 책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일 텐데, 나는 삶에 대한 직시 없이 이 장면은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삶에 두른 유무형의 장식들을 모두 떼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대면하는 일은, 지난 삶을 송두리째 버리기도 해야 하는 일이므로 용기와 결단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화면2>에서 철창을 사이에 둔 오리건과 듀크의 진실하고 솔직한 대면이야말로 삶을 ‘거듭 나는’ 장면이니 내게는 더욱 절실하고 절박하게 다가온다. 둘은 이제 “우박이 내리면 맞으며” 함께 걷고 “옥수수 밭에서는 잔치”를 벌이며 “보드라운 풀밭”에서는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별빛 아래에서는 꿈”을 꾸었고 “새소리는 잠을 깨우는 시계였으며, 강물은 커다란 욕조”였고 마침내 “온 세상이 우리 것”이라 말하고 있다. 마침내 듀크는 “가방 맨 안쪽 구석”에 남은 동전 두 개를 “플랫 강 위에 물수제비”를 뜨며 날려 버린다. 지나온 시간과의 단호한 결별이라 할 수 있다. 로키 산맥의 등줄기 앞에서 “떠돌이 장사꾼, 여배우가 될 거라는 슈퍼마켓 종업원, 이 빠진 깃털 장식을 한 인디언 추장”의 차들을 얻어 타고 ‘아이언 호스’(미국 중서부의 유타 주)에 도착한 듀크와 오리건은 “길가에 버려진 시보레 자동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해인 1935년에 태어난 버려진 시보레 자동차를 가리키며 듀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 모습이 그 차보다는” 낫지 않냐고. 둘은 다시 달리는 기차의 맨 뒤 칸에 올라타 “오리건을 베개 삼아” 몸을 기댄 채 드디어 오리건의 숲에 도착하게 된다. <화면13>의 오른쪽 장면은 우리가 처음 낯선 장소 앞에 섰을 때의 인상을 상기시킨다. 자유의 몸이 된 오리건과 듀크는 삶의 시원처럼 눈앞의 펼쳐진 풍경에 묻혀 그저 먹먹하게 서 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검은 아스팔트와 전봇대만이 그동안의 여행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듀크는 거친 오리건 숲으로 들며 “갇혀 지낸 나날을 모두 잊은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서늘한 숲에 든 이 둘은 모닥불을 피워 차를 끓이며 밤을 지새운다. 오리건과의 약속을 지켰으니 아침이 밝으면 듀크는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가문비나무가 있는 오리건의 숲까지 오리건을 데려다 준 듀크는 홀로 길을 나선다. 하얗게 눈이 덮인 오리건 숲길을 따라 멀어져가는 듀크의 뒷모습에서 듀크가 떼어낸 ‘빨강코’는 지나온 삶과의 결별을 상징하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앞날이 무지갯빛으로 펼쳐질 것 같지는 않다. 이 천박한 세계에서 소수자인 ‘난쟁이’의 삶이 평탄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만 듀크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 거라는 점은 읽어 낼 수 있다. 자신의 이유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던 오리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천 킬로가 넘는 대륙을 횡단하고, 그와의 동행을 진심으로 기뻐한 것으로 보아 듀크는 분명 우리가 응원하고 지지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듀크와 오리건이 하나의 존재, 하나의 목숨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몸에서 떼지 않고 다니는 듀크의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아마도 저 가방 안에는 우리가 신뢰해 마지않는 난쟁이 주인공 듀크가 자신의 인생에서 아직 풀어내지 못한 어떤 숙제를 담고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게 된다.(*) 자료찾기 「오리건의 여행」 / 라스칼 글 ; 루이 조스 그림 ; 곽노경 옮김, 미래i아이:미래M&B, 2017 김환영 1959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고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 『종이밥』 『해를 삼킨 아이들』, 그림책 『나비를 잡는 아버지』 『호랑이와 곶감』 『강냉이』 『빼떼기』, 장편만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들을 그렸고 동시집 『깜장 꽃』을 냈습니다.
    • 제목 아동문학 발견 (어린이청소년연구 2018년 11월 123호)
    • 집필명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 내용 한국의 SF가 걸어온 길 우리말로 된 최초의 SF는 재일 유학생들이 동경에서 만든 잡지인 ‘태극학보’에 연재된 ‘해저여행기담’(1907)이다. 이 작품은 바로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를 번역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서양의 여러 SF들이 우리말로 소개되었는데, 예를 들면 세계 최초로 ‘로봇’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펙의 ‘R.U.R.’이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으로 1925년에 잡지 ‘개벽’에 연재되었고, 시간여행 SF의 원조로 꼽히는 H.G.웰스의 ‘타임머신’도 ‘80만년후의 사회’로 1926년에 잡지 ‘별건곤’에 일부 소개된 바 있다. 번역이나 번안이 아닌 창작 SF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잡지 ‘신소설’ 1929년 12월호에 실린 김동인의 단편 ‘K박사의 연구’가 가장 앞선다. 인분을 원료로 대체식량을 개발했다가 시연회에서 봉변을 당한 과학자가 막상 배설물을 먹었던 개로 만든 보신탕 앞에서 구역질하는 결말을 통해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풍자했다. 동양적 정서와 서양 과학이 빚어낸 통렬한 블랙코미디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 일제강점기에 나고 자라 일본어로 교육받은 세대가 많아지면서 우리말로 된 번역 자체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과학조선’등의 잡지에 SF가 실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도중에 연재가 중단되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다시 우리말을 되찾았으나 SF분야는 계속 암흑기에 머물다가 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기지개를 켜게 되었다. 어린이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해외 SF를 번역하거나 번안한 작품들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작가의 창작 SF는 1965년에야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왔다. 문윤성의 장편인 ‘완전사회’는 인공동면에 들어간 주인공이 미래에 깨어나 보니 여성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묘사했다. 과학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사회학이나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시대를 앞선 걸작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상에 첫 선을 보인지 50년 만인 금년에 재간되어서 페미니즘이나 젠더 평등의 이슈가 부각된 현재에 재조명을 받고 있다. 1970년대 말부터는 어린이청소년이 아닌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완역본 해외 SF들이 속속 소개되기 시작했고, 80년대 들어서는 스포츠신문들이 신춘문예에 SF부문을 만들면서 신인 SF작가의 정식 등용문도 생겼다. 그래도 이 즈음까지는 서점가에서 SF의 존재감은 극히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있었고, 신인 작가들의 활동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창작 SF계의 저변이 다져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 해외의 명작 SF들이 대거 번역 소개되고 동시에 PC통신을 통한 동호인 활동이 조직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는 2000년대 들어 상당한 역량을 갖춘 신인 SF작가들이 속속 등장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해외에까지 서서히 명성이 알려지고 있는 김보영, 김창규, 배명훈, 정소연 작가가 이 시기에 등단했다. SF 관련 간행물로는 1993년도에 ‘SF매거진’이 국내 최초의 SF잡지로 창간되었으나 단 2호 만에 사라져버렸다. 2004년에는 SF전문 무크지 ‘HAPPY SF’가 창간되어 충실한 내용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역시 2호를 끝으로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 뒤 2007년에 SF와 판타지문학을 주로 다루는 장르문학 전문 월간지 ‘판타스틱’이 나와서 상당한 호응을 받으며 2년 가까이 순항하고 신인 작가들도 배출하는 등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출판사가 바뀌고 계간지로 전환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통권 24호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가고 말았다. 현재는 SF&판타지 도서관에서 2009년부터 발행하는 팬 매거진인 SF무크지 ‘미래경’이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고 있다. ‘미래경’의 가장 최근호는 2016년에 낸 4호이다. 21세기 들어 한국의 출판시장은 만성적인 불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SF분야만큼은 점진적이나마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일단 신인 SF작가를 뽑는 공모전만 해도 ‘한국과학문학상’과 '한낙원SF문학상‘이 있고 금년에는 ‘김진재SF어워드'가 신설되었다. 또한 기성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우수작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한국SF어워드‘도 영미문화권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SF상인 ’휴고상‘을 벤치마킹하며 2014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근년 들어서는 ’알파고‘나 ’4차 산업혁명‘,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등의 이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주류문학계가 SF를 대하는 태도도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21세기에 태어나서 자란 세대들이 과학기술의 가속 발달이라는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SF를 사실상의 교양필수로 받아들이??아갈 근미래의 모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숱한 SF들이 다각도로 전망해왔던 풍경인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 제목 해설이 있는 그림책 (어린이청소년연구 2018년 11월 123호)
    • 집필명 김환영 (그림책 작가)
    • 내용 《잘 가, 안녕》 내가 ‘나무’라고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나무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오해다. 이들이 나무를 그린다면 세상의 모든 나무가 그려질지도 모른다. 언어는 구체를 지향하지만, 본질에 있어 추상이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닌, 꽃이나 풀이 아닌 ‘나무’라는 개별 지식과 경험으로만 언어는 공유될 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한다 해도 ‘객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으로 착각하기 쉬운 사진도 주관일 뿐 실제(Reality)가 아니다. 그러니 내 손에서 그려지는 도상이 정말 내 것인지를 화가는 자주 의심할 필요가 있다. 김동수는 자신의 이야기가 필요로 하는 납작하고 단순한 도상들만 남겨놓는다. 언뜻 그 도상들은 아이들 그림처럼 서툴러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표지는 소박을 넘어 적막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왠지 따스하다. 꽃을 물고 있는 오리의 부리는 넓적해 꽃은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사체를 대면하는 것은 고통이지만, 화가는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사뭇 유머러스하게 표현함으로써 정서적, 시각적 부담을 덜어내고 있다. 그런데도 오려 붙인 종잇장 같은 도상들이 실감을 품게 되는 까닭은 무언가. 화가는 자신이 통제 가능한 의도한 도상만으로 무대를 설계하고 있으며,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요소들은 애시당초 등장시키지 않는다. 자신이 설정한 화면 속의 모든 요소들에 필연성이 부여되며, 화가는 그 도상들로 임무를 완성시키고 있다. 가령 할머니의 독특한 외양은 사뭇 과장되어 있지만, 오직 정면과 옆면, 뒷면으로만 화면에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동물들과 다른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작가는 이런 표현을 즐기는 것 같다) 초등학생의 일기 같은 단순한 문장들과 이러한 표현전략 때문에 우리는 말이 서툰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데뷔작인 《감기 걸린 날》(보림 2002)에서부터 일관하는 작가의 이런 발성은 어린이 세계를 드러내는 데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그로 인해 발화의 힘이 증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잘 가, 안녕》(보림, 2016)은 첫 문장부터 어린이 책에서 꺼릴만한 ‘죽다’란 단어를 움직여 쓰고 있다. 동물들의 눈은 마치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작가는 할머니를 통해 절단 난 뱀을 이어 붕대로 감싸주고, 부엉이의 배를 꿰매고 깃털을 다시 심어주며, 납작해진 개구리를 입으로 불어 풍선처럼 도톰한 본디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강아지의 쏟아져 나온 배알을 다시 넣어 꿰매고 흐트러진 털을 빗으로 곱게 빗겨준다. 그리고 텅 빈 눈들을 모두 감겨준다. (처음 이 그림책을 봤을 때 나는 팀 버튼이 떠올랐다. 《프랑켄위니 Frankenweenie》(2012)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애견 ‘스파키’를 꿰매고 전기를 통해 되살려 놓던 발상과 도상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밖에는 실비가 내리고 화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살빛이 도는 연꽃들을 강물 위에 띄움으로써 서러운 죽음들의 극락왕생을 빈다. 치유를 마친 동물들을 조각배에 가지런히 눕힌 다음, 오리들이 입으로 물어 다음 세상으로 정성스레 안내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 다리 건너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는 누구일까. 산 사람일까, 죽은 사람일까? 마치 노숙자처럼 디자인된 할머니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는 엉겨 붙은 머리카락에 눈마저 가려놓아 내면을 알기 어렵다. 코는 검은 막대처럼 일직선이고 입과 주름은 실로 꿰매어버린 헝겊만 같다. 할머니의 얼굴은 죽음을 품고 있거나 마치 제웅처럼 삶보다는 죽음과의 친연성이 도드라져 허깨비가 허깨비를 꿰매며 위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그래서 이 모든 행위의 주체인 할머니의 집이 도시의 외곽(강아지가 트럭 치여 죽은 장면1)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설정에 나는 주목하게 된다. 다리 건너에 홀로 있는 할머니의 집은, 현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만들어 낸 상상의 공간이자 대속(代贖)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바깥세계와 할머니의 방은 ‘어둠’과 ‘빛’으로 대별되어 있어 빛의 자리인 할머니의 방안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인 중음신(中陰身)의 처소로 다가온다. 그렇게 작가는 가로등이 눈을 뜬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의 컴컴하거나 어슴푸레한 시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해 여린 생명들이 무참하게 짓밟히던 광폭한 시공간에서 미세한 심장 소리에도 귀 기울일 수 있는 고요한 시공간으로 독자를 이끈다. 고요 속으로 한껏 귀를 열게 한 다음 방으로 들여와 노랗게 불을 켜고 우리가 그동안 저지른 일들을 눈앞에 가만히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는 당연히 ‘여성’이지만, 나는 외양이 아닌 이 작품의 발상과 상상력에서 할머니의 여성성을 공감하게 된다. 무참하게 죽은 동물들을 거두어 삽을 들고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내밀한 영역인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 불을 켜고 동그란 반짇고리를 열어 일일이 터진 곳을 꿰맨 다음 이불 속에 뉘는 행위를 남성인 나로서는 발상조차 불가능하다. 더구나 매번 말을 걸어주고 예쁘다고 토닥거리며 나란히 눕는 할머니(또는 작가)의 모습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세상의 어머니들을 떠올리게 된다. 네 누운 이곳에 네 목소리는 없구나 집에 가자 이제 집에 가자 김해자의 시 ‘피에타’ 의 한 부분. 《집에 가자》(삶창, 2015) 이렇듯 화가의 눈길은 다수가 외면한 자리에 오롯이 머물러 있다. 홀로 주검 가까이 다가가 이들의 심장에 청진기를 대는 일은 투명하고 정직한 자의 몫이다. 이 그림책을 이루고 있는 묵직한 주제, 그러니까 사체를 수습해 염(殮. 망자의 복원)을 하는 할머니(작가)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명들의 숭고함은 복구되며, 독자는 노란 불빛과 이불처럼 평화로운 위로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게 된다. 강아지의 죽음을 코앞에서 본 고양이의 동선 또한 그럴 것이다. 고양이는 할머니의 뒤를 쫓아 처참한 죽음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없이 기록하고 기억하는 존재로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이 예민하고 조용한 동선은, 대속자인 할머니의 집 둘레에 작은 곡선과 온기를 보태며 적막하기만 한 바깥 공기를 소리 없이 정화시킨다. 그렇다면 아침놀 위에 올려놓은 마지막 문장, “오늘도 어제처럼 날이 맑았습니다.”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에 대한 통렬한 반어법이자 무참하고 무자비한 죽음들이 더는 없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쓸쓸한 비나리로 나는 읽게 된다. 얼마 전 내가 어린이책 둘레에 아직도 남아있는 까닭을 깨달았다. 그것은 위로였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일화 하나를 떠올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림 한 장이 아문 듯 덮여있던 어릴 적 상처와 아픔들을 일시에 불러들였고, 이어 그린 또 한 장의 그림을 통해 나는 커다란 위안을 받고 울었다. 그린다는 행위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니… 이 그림책을 차에 치여 죽은 동물들이 본다면, 어쩌면 나처럼 적지 않은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 그림책이 국제적인 상을 받는다고 무조건 기뻐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국제적인 상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의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행렬과 무관하게 ‘눈치도 없이’ 이곳의 이야기를 전면화 시키고 있는 작가와 작품들이 우리에게 더욱 소망스러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작품이 상당히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러한 그림책 작가가 있어 참 다행이다. 어른인 김동수가 아이 같은 천진스럽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말할 때, 그거야말로 거의 모든 연령대를 두드리는 목소리가 될 것이다. 이른바 ‘0살부터 100살까지’를 온전히 만족시키는. (*) 자료찾기 「잘 가, 안녕: 김동수 그림책」 / 김동수 [지음], 보림, 2016 김환영 1959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고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 『종이밥』 『해를 삼킨 아이들』, 그림책 『나비를 잡는 아버지』 『호랑이와 곶감』 『강냉이』 『빼떼기』, 장편만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들을 그렸고 동시집 『깜장 꽃』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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